작사가 팀 라이스는 2008년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체스> 콘서트를 앞두고 자신이 아바(ABBA)의 베니 앤더슨, 비요른 울바에우스와 함께 쓴 이 뮤지컬을 “방황하는 아이”에 비유했다. 그는 “마약에 빠졌지만 언젠가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그런 아이”라고 덧붙였다.
이 작품의 복잡다단한 과거는 이미 유명하다. 1984년 컨셉 앨범으로 시작한 <체스>는 머레이 헤드의 ‘One Night in Bangkok’이 전 세계 차트를 휩쓸고, 일레인 페이지와 바바라 딕슨의 듀엣곡 ‘I Know Him So Well’이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듀엣곡 중 하나로 기록되는 등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1986년 웨스트엔드 프로덕션은 3년간 장기 공연에 성공했다.
하지만 1988년, 희곡작가 리처드 넬슨이 대사를 대폭 수정한 브로드웨이 버전은 단 두 달 만에 막을 내리며 <체스>를 ‘제작 불가능한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후 수많은 제작자가 이 ‘방황하는 아이’를 길들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새로운 시도, 논란의 ‘메타 유머’
이제 토니상 수상 연출가 마이클 메이어(<스프링 어웨이크닝>)와 에미상 수상 작가 대니 스트롱(<엠파이어>, <돕식>)이 이 게임에 뛰어들었다. 11월 16일 임페리얼 시어터에서 개막한 이번 첫 브로드웨이 리바이벌은 작품의 가장 큰 자산, 즉 ‘스코어’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대니 스트롱의 새로운 각본은 <체스>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듯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가장 엔터테이닝한 냉전 뮤지컬’이라는 명목하에, 현재의 정치 상황과 엉성한 줄거리를 비꼬는 메타 유머를 주입한 것이다.
특히 <젠틀맨스 가이드>의 스타 브라이스 핑크햄이 연기하는 ‘아비터(심판)’의 역할이 전지적 해설자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는 “오늘 무대에서 보실 것들이 다소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 미친 짓 중 일부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식의 대사를 던진다.
1972년 보리스 스파스키와 바비 피셔의 체스 챔피언십에서 영감을 받은 냉전 시대 배경의 뮤지컬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윙크’ 섞인 해설이 아주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의 ‘뇌 벌레’ 농담이나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재선 관련 풍자처럼 관객을 불쾌하게 만드는 지점들이다. 연출가 마이클 메이어는 작품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진지하게 파고들기보다, 감정적인 순간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무너뜨리며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귀를 사로잡는 음악과 폭발적인 캐스트
이러한 연출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체스> 회의론자들마저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단연 압도적인 스코어와 이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역량이다.
러시아 챔피언 아나톨리 세르기예프스키 역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퍼, 미국 챔피언 프레디 트럼퍼 역의 아론 트베잇, 그리고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체스 전략가 플로렌스 바시 역의 레아 미셸이 그 중심에 있다.
<체스>의 모든 곡은 그 자체로 명곡이다. 1막을 마무리하는 아나톨리의 ‘Anthem’은 조쉬 그로반의 버전을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하며, 트베잇은 프레디의 불안정한 심리를 표현한 ‘Pity the Child’에서 폭발적인 고음을 완벽하게 소화한다. 레아 미셸이 부르는 파워 발라드 ‘Nobody’s Side’의 “나는 내 현재 파트너를/ 불완전한 시제로 본다”와 같은 가사는 팀 라이스 최고의 작사로 꼽힐 만하다.
냉전의 체스판, 무대 위의 심리전
이 극은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냉전 시대의 삼각관계를 다룬다. 거만한 미국 그랜드마스터 프레디(트베잇)와 고뇌하는 러시아 라이벌 아나톨리(크리스토퍼)가 세계 체스 챔피언십에서 맞붙는다. 한편, 헝가리 태생의 플로렌스(미셸)는 프레디의 연인이자 전략가이지만, 과거 가족의 비극을 초래한 소련을 증오하면서도 아나톨리에게 끌리게 된다.
극은 체스 게임을 지정학적 풍경의 은유로 사용하지만, CIA와 KGB의 계략은 긴장감을 유발하기엔 다소 미약하다. 무대 위에서 실제 체스 경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있지만, 연출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 프레디와 아나톨리는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마이크에 자신의 속마음을 속삭인다. “아버지가 떠난 것을 비난하진 않지만, 여전히 그를 증오한다. 폰을 D5로.” (프레디), “그는 플로렌스를 가질 자격이 없다. 나이트를 C3로.” (아나톨리)
결국 체스 말은 배우들 자신이다. 플로렌스, 프레디, 아나톨리, 그리고 아나톨리의 아내 스베틀라나(해나 크루즈)가 바로 체스판 위의 말들이며, KGB 요원과 CIA 요원이 미소 간의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이들을 조종한다.
레아 미셸, 화려한 브로드웨이의 여왕
2022년 <퍼니 걸> 리바이벌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비평가들의 호평과 흥행력을 모두 입증한 레아 미셸이 차기작으로 <체스>를 선택한 것은 그 자체로 용감한 결정이다. 동시에 이 스코어가 그녀의 놀라운 가창력에 얼마나 완벽하게 부합하는지 보여주는 영리한 선택이기도 하다.
미셸은 플로렌스 역을 통해 불같으면서도 연약하고, 관능적이면서도 현명한 다층적인 매력을 선보인다. 배우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준 그녀의 목소리는 ‘Someone Else’s Story’나 아나톨리의 아내 역을 맡은 해나 크루즈와의 강렬한 듀엣곡 ‘I Know Him So Well’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빛난다.
특히 그녀가 ‘Nobody’s Side’를 부르는 순간은 관객에게 전율을 선사하며, 레아 미셸이 현존하는 브로드웨이 최고의 주연 배우 중 한 명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이처럼 눈부신 스타들의 헌신적인 열연이 없었다면, <체스>의 이번 리바이벌은 견디기 힘든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