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오픈이 새로운 ‘자이언트 킬러’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렸던 날, 22세의 정현은 테니스계의 거인들을 연달아 무너뜨리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승리를 확정 지은 직후 중계 카메라 렌즈에 “난 불타오르고 있다(Chung on fire)”라고 큼지막하게 적어 넣은 그의 모습에는 굳이 숨길 필요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앞선 16강전에서 무결점의 챔피언 노박 조코비치를 완파한 뒤 남긴 “캡틴 보고 있나?”라는 도발적인 메시지 역시 그의 범상치 않은 멘탈을 짐작게 했다.
일약 세계 테니스의 샛별로 떠올랐음에도 그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승리를 목전에 둔 3세트 마지막 게임, 40-0으로 앞선 상황에서 속으로 세리머니를 어떻게 할지 한가롭게 고민하다가 순식간에 브레이크 포인트까지 몰렸다며 “그때부터는 어떻게든 공을 상대 코트로 넘겨야 한다는 생각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재치 있게 털어놓아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두려움 없는 멘탈과 철저한 심리전
강철 같은 체력과 흔들림 없는 마인드는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다음 8강전 승자인 로저 페더러와 토마시 베르디흐 중 누구와 맞붙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누가 올라오든 50 대 50이다. 상관없다”며 피상적인 겸손 대신 당당함을 택했다. 테니스 황제 페더러를 피하고 싶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깬 답변이었다. 그랜드슬램의 2주 차 강행군 속에서도 경기 후 꾸준한 스트레칭과 마사지, 그리고 겨울철 혹독한 하체 훈련 덕에 체력적인 부담은 없다고 일축했다.
특히 거물급 선수들을 상대로 흔들림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그는 어릴 적부터 코트에 들어서면 속마음을 절대 얼굴에 드러내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감정을 들키는 순간 상대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과 같다는 철학이다. 이를 위해 박성희 퍼포먼스심리연구소장과 꾸준히 경기를 복기하며 내면의 안정을 다지고 있다. 쏟아지는 수백 통의 축하 메시지에 일일이 답장하느라 바쁘다면서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금요일에 다시 만나자”며 팬들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압박감을 지배하는 자가 승리한다: NCAA 준결승의 혈투
이러한 코트 위의 처절한 멘탈 싸움과 극한의 중압감은 비단 그랜드슬램 같은 프로 무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펼쳐진 미국 대학스포츠협회(NCAA) 디비전 1 테니스 챔피언십 준결승 토요일은 톱시드와 디펜딩 챔피언이 줄줄이 무너지는 대이변과 함께 이성과 감정이 교차하는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텍사스대(2번 시드)와 TCU(6번 시드)의 맞대결, 그중에서도 세바스찬 고르즈니와 던컨 찬이 맞붙은 1번 단식 경기에서 터져 나왔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불과 1년 전 TCU의 창단 첫 내셔널 챔피언십 우승을 합작했던 절친한 동료였다. 우승 직후 텍사스대로 적을 옮긴 고르즈니는 이제 최고참 에이스가 되어 옛 동료의 서브를 받아내야 했다.
세트 스코어 1-1로 맞선 3세트, 벼랑 끝에 몰린 고르즈니는 무려 5번의 매치 포인트를 지켜내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특히 상대 서브게임에서 터진 기적 같은 백핸드 패싱샷은 경기의 백미였다. 네트 대시를 시도하는 상대를 뚫어내며 발목이 꺾여 코트에 나뒹굴면서도 기어코 포인트를 따낸 그는 “솔직히 운이 좋았다. 그 샷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대로 짐을 싸야 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 극적인 브레이크로 자신감을 되찾은 고르즈니는 타이브레이크를 완벽히 압도하며 승부를 가져왔다.
그가 이토록 흔들림 없이 클러치 상황을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뼈아픈 패배의 경험에 있었다. 정규시즌 LSU와의 경기에서 3세트 5-2 리드를 쥐고도 스스로 무너지며 역전패했던 기억이 그를 성장시켰다. 고르즈니는 “그때 처참하게 무너졌던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내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결코 몰랐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전염되는 투지, 판을 뒤집는 동료애
개인전의 고독함과 달리 단체전에서는 동료의 투지가 곧 나의 무기가 된다. 고르즈니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바로 옆 코트에서 지켜본 신입생 칼린 이바노프스키(마케도니아)는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고르즈니가 숱한 매치 포인트를 지켜내는 걸 보며 나 역시 끝까지 버틸 힘을 얻었다”는 그는 끈질긴 접전 끝에 코스메 롤랑 드 라벨을 꺾으며 팀의 4-3 대역전승에 마침표를 찍었다. 브루스 버크 텍사스대 감독은 복식 포인트를 내주고도 끝내 승부를 뒤집은 선수들의 놀라운 회복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초인적인 뒷심을 발휘한 건 텍사스뿐만이 아니었다. 버지니아대 역시 웨이크 포레스트를 상대로 첫 복식을 내주고 이어진 단식 5경기에서 모조리 첫 세트를 빼앗기는 최악의 출발을 보였다. 정규시즌에 이미 두 번이나 덜미를 잡혔던 상대였기에 패색이 짙어 보였지만, 안드레스 페드로소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곳은 완전히 새로운 무대이며 과거의 전적은 무의미하다”며 선수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선수들은 딜런 디트리히가 따낸 값진 첫 단식 승리를 시작으로 보란 듯이 판을 뒤집으며 결승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결국 테니스는 라켓을 쥔 손끝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찰나의 승부처다. 호주오픈 무대에서 홀로 거인들과 맞서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정현의 대담함이나,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옛 실패를 자양분 삼아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낸 NCAA의 영건들 모두 본질적인 싸움의 결은 같다. 승패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네트 건너편의 강력한 상대가 아니라, 내면의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서늘한 포커페이스와 꺾이지 않는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