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영토 확장: 독자적인 ‘고담’의 탄생부터 가장 현실적인 히어로의 등장까지

수십 년간 DC가 마블에 비해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도시 그 자체의 매력이다. 시카고나 뉴욕, 피츠버그 같은 실존 도시들의 어두운 이면을 긁어모아 탄생시킨 고담시는 그 자체로 숨 쉬는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였다.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을 떠올려보라. 빗물에 젖은 거리 위로 우뚝 솟은 고딕 건축물들은 부패와 시스템의 붕괴를 시각적으로 고발하며, 제임스 건이 이끄는 새로운 DCU 역시 곧 자신들만의 고담을 선보일 채비를 마쳤다. 그런데 2026년, 마블이 마침내 이 묵직한 도전에 응답했다. 그것도 관객들 코앞에, 아무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뉴욕의 한 구역을 슬쩍 밀어 넣으면서 말이다.

그 무대는 바로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 ‘퍼니셔: 원 라스트 킬’에 등장하는 ‘리틀 시칠리아’다. 무법천지로 변해버린 이 동네는 자연스레 배트맨의 그 엉망진창인 구역과 겹쳐 보인다. 물론 두 세계관의 태생이 다른 만큼 차이점도 명확한데,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역시 규모다. 고담이 경찰국부터 자선 단체까지 도시 전체의 뼛속 깊이 부패가 스며든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라면, 리틀 시칠리아는 그저 혼돈에 집어삼켜진 작은 동네, 단일 구역일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좁은 스케일이 만들어내는 극강의 밀도는 관객들에게 훨씬 더 노골적이고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거대한 악당이 아니라 당장 골목을 돌면 마주칠 것 같은 현실적인 공포감이랄까. 특히 ‘데어데블: 본 어게인 시즌 2’의 서사를 방금 지나쳐 몇 달 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이 숨 막히는 무법지대의 등장은 세계관 내에서도 꽤나 묵직한 파장을 던진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렇듯 현실의 거친 밑바닥을 파고든 마블은, 캐릭터의 서사에서도 대중의 ‘현실적 공감대’를 정조준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마블의 새로운 시리즈 ‘원더맨’의 주인공 사이먼 윌리엄스 역을 맡은 야히아 압둘마틴 2세다.

이미 코믹스 팬들에겐 DC ‘아쿠아맨’의 블랙 만타나 HBO ‘왓치맨’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그는 2022년 이 배역에 합류했다. 스탠 리와 돈 헥, 잭 커비의 손에서 탄생한 사이먼 윌리엄스는 당초 이온 에너지를 얻어 어벤져스와 맞서 싸우는 빌런으로 첫선을 보였지만, 훗날 슈퍼히어로로 거듭나 팀에 합류하게 되는 꽤나 입체적인 서사의 주인공이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초능력을 얻고 원더맨이 되어 히어로의 세계에 냅다 내던져진 할리우드 배우의 궤적을 쫓는다.

압둘마틴 2세는 최근 데드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대중이 이 캐릭터에 얼마나 깊이 이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꽤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는 “사람들은 사이먼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엄청나게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라며, 배우나 작가, 감독 같은 업계 사람들은 물론이고 팟캐스터나 자신이 일하는 건물의 경비원까지 누구나 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신이나 직업을 불문하고 ‘꿈을 꾸고 그것을 믿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결의 캐릭터 묘사가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제작진의 공이 크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연출한 데스틴 다니엘 크리튼과 ‘브루클린 나인-나인’, ‘커뮤니티’ 같은 걸출한 코미디 명작들을 빚어낸 작가 겸 프로듀서 앤드류 게스트가 시리즈의 키를 잡았다.

압둘마틴 2세는 이들과의 작업이 철저한 소통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대본 자체도 훌륭했지만 결국 영상화 과정에서는 유동적으로 변하기 마련이기에, 그에게는 데스틴과 앤드류라는 창작자들이 지닌 일관성이 훨씬 중요했다. 그는 “우리가 나눈 모든 대화는 ‘무엇이 확정되었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맞춰져 있었다”며, 콜시트 1번으로서 자신의 목소리와 의견이 스토리에 고스란히 반영될 거란 확신 속에 연기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리틀 시칠리아의 골목을 채우는 눅눅한 범죄의 냄새든,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초능력을 얻게 된 삼류 배우의 꿈과 좌절이든, 지금 마블이 보여주려는 세계는 분명하다. 단순히 우주를 구하고 빔을 쏘는 화려한 볼거리를 넘어, 관객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가장 어둡거나 보편적인 구석으로 시선을 돌려 세계관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