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0승 투수와 타자들의 진화: 육성선수 신민재가 증명한 KBO의 새로운 시대

KBO 리그의 전반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야구계의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올해 마운드와 타석의 분위기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오스틴 딘(LG)과 김도영(KIA)이 치열한 홈런 공방전을 벌이고, 박성한(SSG)이 주도하던 타격왕 경쟁을 최원준(KT)이 단숨에 뒤집는 등 타자들의 화력이 불을 뿜는 반면, 마운드 위에서는 ‘압도적 에이스’의 실종이라는 낯선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전반기가 끝나가도록 단 한 명의 10승 투수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KIA의 아담 올러가 9승으로 다승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이범호 감독이 휴식 차원에서 그를 1군 엔트리에서 말소시키며 전반기 10승 달성은 무산됐다. 류현진(한화), 최민석(두산), 앤더스 톨허스트(LG) 역시 8승에 머물러 있어 올스타 브레이크 전 두 자릿수 승수를 기대하긴 어렵다.

최근 몇 년간의 전반기 10승 투수 지표

연도 전반기 10승 달성 투수 시대적 특징
2022 케이시 켈리(12승) 등 4명 외국인 투수 절대 강세
2023 에릭 페디(12승), 아담 플럿코(11승) 1선발의 압도적 구위 지배
2024 엔마누엘 데 헤수스, 코디 폰세(11승) 등 외인 에이스의 다승 경쟁
현재 0명 (1위 아담 올러 9승) 체계적 관리와 타자들의 적응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언터처블’ 외국인 에이스의 부재를 꼽는다. 최원호 해설위원은 “작년 폰세나 와이스, 혹은 그 이전의 톰슨, 페디, 켈리 같은 선수들은 리그를 압도했다”며 “지금은 타자들 스스로도 ‘절대 못 칠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없다’고 느낀다. 타순이 한 바퀴만 돌아도 타자들이 공략법을 금방 찾아낸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현대 야구의 화두인 ‘철저한 투수 관리’도 한몫을 하고 있다. 제춘모 KT 투수코치의 말처럼 10년 전과 비교해 투수 운용은 훨씬 체계적이 되었다. 선발 투수가 70~80이닝을 소화하면 1군에서 말소시켜 열흘간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 공식처럼 굳어졌다. 선발 로테이션을 한두 번 거르면 자연스레 등판 횟수가 줄고, 이는 곧 다승 경쟁에서의 불리함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과거 전반기 다승 상위권 투수들이 평균 17~18경기에 나섰던 반면, 올해는 16경기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FA 등록 일수와 직결되는 예민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선수와 코칭스태프 간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구위가 떨어지기 전에 먼저 ‘쉬어가는’ 타이밍을 잡는 것이 뉴노멀이 되었다.

‘치고 또 치고’, 마운드의 빈틈을 파고든 타자들의 역습

투수들이 구위 저하와 이닝 관리의 딜레마에 빠진 사이, 타자들은 한층 정교해진 타격으로 마운드를 맹폭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고투저’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진화를 보여준 선수가 바로 LG 트윈스의 주전 2루수 신민재(29)다.

171cm, 67kg의 작은 체구. 2015년 신인 드래프트 미지명. 두산 베어스 육성선수 입단 후 1군 무대 등판 전무. 2017년 2차 드래프트를 통한 LG 이적까지, 그의 야구 인생은 그저 짧은 순간 그라운드를 밟는 ‘대주자’에 머무는 듯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2025년, 그는 마침내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올해 정규시즌 팀 내 타율 1위(0.313, 전체 9위)로 타격을 만개한 그는, 한화 이글스와 맞붙은 한국시리즈(KS)에서 타율 0.409(22타수 9안타), 3타점, 6득점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겼다. 투수들의 위력이 반감된 리그 트렌드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끈질기게 투수를 물고 늘어지는 타자로 거듭났다.

에이스를 무너뜨린 4차전의 2루타, 그리고 인간 승리

신민재의 진가가 가장 빛난 순간은 KS의 분수령이었던 4차전이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과거 KBO 전반기에만 10승을 거두며 ‘압도적 에이스’로 군림했던 한화 선발 라이언 와이스였다.

LG가 0-3으로 끌려가던 8회초 2사 주자 없는 상황, 마운드에는 시속 149km의 묵직한 직구를 뿌리는 와이스가 버티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물러났을 구위였지만, 신민재는 달랐다. 그는 와이스의 직구를 완벽하게 공략해 중견수 쪽 2루타를 터뜨렸고, 굳건했던 에이스 와이스를 기어이 강판시켰다. 후속 김현수의 안타 때 홈을 밟으며 득점의 물꼬를 튼 신민재의 활약에 힘입어 LG는 9회초에만 무려 6점을 뽑아내며 7-4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경기 후 그는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 모두 포기하지 않았다”며 특유의 담담하지만 단단한 멘탈을 보여줬다.

이천 2군 훈련장에서 완성된 ‘꾸준함’의 미학

2019년과 2020년 포스트시즌을 대주자와 대수비로만 경험했던 신민재는 2023년부터 본격적인 주전 2루수로 발돋움했다. 그해 122경기에 나서며 우승 반지를 꼈지만 KS 타율은 0.167(18타수 3안타)에 그쳤고, 이듬해인 2024년 타율 0.297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완벽한 상수는 아니었다.

올해 5월 11일, 그의 타율이 0.191까지 곤두박질치며 2군행 통보를 받았을 때만 해도 시련은 끝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가 오히려 그를 ‘3할 타자’로 거듭나게 한 터닝포인트가 됐다.

  • “이천 2군 훈련장에서 오전에 치고, 밥 먹고 치고, 야간에도 쳤습니다.”

팬들 사이에서 ‘치고 또 치고’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낸 이 지독한 훈련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과거 두 달 정도 반짝하다가 한 번 꺾이면 헤어 나오지 못하던 패턴을 끊어내고, 5월 이후 그에게는 전에 없던 ‘꾸준함’이 장착되었다. 자신만의 타격 메커니즘을 정립하며 타석에서 편안함을 찾은 것이다.

우승 주역의 시선은 이미 다음 무대로 향한다

10월 31일 대전에서 열린 KS 5차전에서 4-1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신민재. 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우승 세리머니에서 취재진과 만난 그는 맹타를 휘두른 타격보다는 “수비가 괜찮았고 번트 시도도 성공했다. 수비와 작전에서 실수가 없었던 점이 가장 만족스럽다”며 끝까지 기본기를 강조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압도적 에이스가 사라진 틈을 타 타자들의 기술과 끈기가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한 2025년. 철저한 투수 관리라는 명분 아래 투수들의 체력이 안배되는 동안, 신민재는 2군 훈련장에서 방망이가 부서져라 스윙을 돌리며 스스로를 단련했다.

우승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4일, 그는 곧바로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체코, 일본과의 프리미어12 평가전을 준비한다. “이틀이나 쉬지 않나. 오래 쉬는 것보다 야구를 조금 더 오래 하는 게 좋다”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육성선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완벽한 리그 최정상급 내야수로 거듭난 선수의 여유와 품격이 묻어난다. KBO의 새로운 시대는 바로 이런 선수들에 의해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