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 잔디는 결코 누구에게나 호락호락하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사투는 대회 첫날부터 코트를 뜨겁게 달군다. ‘디펜딩 챔피언’ 야닉 시너와 윔블던 통산 7회 우승에 빛나는 노바크 조코비치조차 이번 대회 1회전부터 진땀을 뺐다. 우 이빙(중국)을 마주한 조코비치는 3시간 12분 동안 그야말로 고군분투를 펼쳤다. 2세트 막판 지붕이 닫히며 경기 조건이 급변하자 언더독에게 열광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커졌고, 이는 통산 25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노리는 챔피언의 심기를 거슬렀다. 3세트 9번째 게임에서 천금 같은 브레이크를 성공시킨 뒤 귀 뒤로 손가락을 갖다 대며 관중석을 도발하던 그의 모습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서브 사이사이 관절을 풀고, 라켓으로 자신의 골반을 내려치며 어떻게든 짜내려 했던 그 에너지는 메이저 대회의 중압감이 얼마나 끔찍한지 방증한다. 결국 4세트 승부처에서 브레이크를 챙기며 ‘윔블던 1회전 무패’ 기록을 지켜냈지만,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시너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오미르 케츠마노비치(세르비아)를 상대로 무려 5세트까지 가는 혈투(4-6 6-3 6-7 6-2 6-3)를 치러야만 했다. 1세트를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한 데다, 3세트 타이브레이크 직전에는 무릎이 안쪽으로 꺾이며 코트에 나뒹굴기까지 했다. 당장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메디컬 타임아웃조차 부르지 않고 훌훌 털고 일어나 기어코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처럼 최상위 랭커들조차 1회전부터 뼈를 깎는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 바로 메이저 무대다. 하지만 한계를 시험하는 랠리보다 선수들의 숨통을 더 옥죄는 것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결승전이 끝난 직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지는 ‘패장 인터뷰’라는 기묘한 의식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네트를 사이에 두고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던 두 선수가 나란히 서서 소감을 밝히는 건 테니스만의 독특한 관례다. 타 종목도 패장 인터뷰를 하긴 하지만 대개 믹스드존이나 프레스룸에서 미디어를 상대로 조용히 치러질 뿐, 코트 한가운데서 수만 명의 팬들을 향해 패배의 쓴맛을 공개적으로 곱씹게 만드는 스포츠는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 ESPN이 ‘테니스에서 준우승 스피치의 예술성과 고통’이라는 기사로 이 가혹한 전통을 조명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5년 전 호주오픈 결승에 올랐던 제니퍼 브레이디는 전날 밤 경기 전략보다 인터뷰 스크립트를 짜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털어놨다. 오사카 나오미에게 우승컵을 내준 뒤 “평생을 바친 목표가 눈앞에서 날아갔는데, 5분도 안 돼서 시상대에 올라 관계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상대를 축하해줘야 했다”며 씁쓸해하던 그의 회고는 꽤나 현실적이다. 무대 뒤에선 한 시간 넘게 오열하겠지만,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리며 긍정적인 언어를 뱉어야 하는 일종의 촌극인 셈이다.
물론 이 가혹한 순간을 ‘웃음’이라는 무기로 교묘하게 방어하는 베테랑들도 존재한다. 1일 끝난 호주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10전 전승을 달리다 첫 패배를 뼈저리게 맛본 조코비치조차 무대 위에선 여유를 잃지 않았다. 카를로스 알카라스에게 우승을 내준 뒤 “이겼을 때와 졌을 때 읽을 연설문을 따로 준비해왔다”며 넉살을 떤 그는 “당신은 아직 젊으니 앞으로 기회가 많을 거다, 나처럼 말이야”라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녹였다. 관중석의 라파엘 나달을 향해 “오늘 스페인 전설 두 명을 상대하느라 불공평했다”며 코트 안팎을 웃음바다로 만든 센스는 가히 유머파의 거두답다.
다닐 메드베데프의 ‘개그 본능’도 지지 않는다. 2019년 US오픈 결승에서 나달에게 2-3으로 분패한 뒤, 주최 측이 대형 스크린으로 나달의 메이저 18승 하이라이트를 주야장천 틀어주자 그는 마이크를 잡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만약 오늘 내가 우승했으면 도대체 뭘 틀어주려고 했어요?” 관중석에선 여지없이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모든 선수가 패배의 쓰라림을 능수능란하게 포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멘탈이 산산조각 난 상태에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아리나 사발렌카는 작년 프랑스오픈 결승에서 코코 고프에게 진 뒤 “내가 하도 에러를 남발해서 고프가 이긴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가 팬들의 뭇매를 맞았다. 2023년 호주오픈 주니어 단식 결승에서 패한 미라 안드레예바는 아예 시상식 내내 분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인간적인 면모가 대중의 가슴을 더 깊게 울리기도 한다. 지난해 윔블던 결승에서 이가 시비옹테크에게 단 한 게임도 따내지 못하고 0-2(0-6, 0-6) ‘더블 베이글 스코어’로 참패했던 어맨다 아니시모바의 스피치는 묘한 여운을 남겼다.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집어삼키며 의례적인 축하 인사를 건넨 그는 관중석의 어머니를 언급하며 결국 다시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엄마가 오늘 아침 비행기로 오셨는데 진짜 너무 죄송해요. 제가 여기까지 오도록 모든 걸 다 해주셨거든요. 그동안 엄마가 직관 오면 제가 맨날 졌는데… 오늘 진 건 절대 엄마 때문이 아니에요.”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뱉어낸 이 서툰 진심에 팬들은 따뜻한 웃음과 함께 어느 때보다 커다란 격려의 박수를 쏟아냈다.
이처럼 갖가지 드라마가 연출됨에도 불구하고, 이 잔인한 의식이 굳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묵직한 물음표가 뒤따른다. 올해 호주오픈 준우승자 사발렌카는 일찌감치 ‘준우승자 인터뷰 폐지론’에 힘을 실었다. “준우승자를 왜 시상식 내내 세워두는지 모르겠어요. 진 선수에게는 인생 최악의 순간이고, 당장이라도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을 만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코트 위에서 바닥을 뒹굴며 짐승처럼 땀 흘려 싸운 대가가, 패배 직후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자신의 가장 약한 상처를 헤집어 전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선수들에겐 너무도 가혹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환호하는 테니스라는 스포츠의 가장 잔인한 민낯일 것이다.